2019. 11. 24. 15:01ㆍ자유와 희망
그리스도와 니고데모
요3:9-21
성령 받고 거듭나라
니고데모는 유대교의 산헤드린의 최고의원이었으나,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의 가르침을 구했다.
1. 밤늦게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질문(거듭남의 개념)
2. 오래된 교회 교사도 성경을 모를 때가 있다.
3. 왜냐면 믿음이 성령으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성경은 믿음을 의지하여 읽는 책이다.
5.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주신 선물이 영생(거듭남)이다.
6.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이고 불신은 심판이다.
7. 정죄가 오는 것은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이다.
8. 왜 빛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가? 자기의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다.
9. 진리를 따르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성경을 볼 때 의문이 일어나야 한다. 왜냐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왜? 라는 질문이 없다면 나 역시 니고데모처럼 밤중에 그리스도를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읽고 묵상하고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지? 물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은 질문을 통해서 깨달아 가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성도가 되기보다 종교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정치가로서 만족한 사람이다. 권력은 좋으나 성도가 되는 것은 부담스러운 사람일 것이다. 교회에 가는 목적이 주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 그런데 사실 여러 가지 일들로 간다.
주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했다. 왜 놋으로 만든 뱀이었는가? 놋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제단에 동물희생을 놓으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즉 뱀은 죄악을 의미하고, 놋은 심판을 뜻한다. 이 둘을 합하면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심판을 하는 것이다. 놋은 강함을 뜻하는데, 금과 은보다 강하신 놋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그리스도이신 놋 장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불 뱀에게 물린 자는 약으로 다스리지 말 것이며, 사람의 긍휼에 기대지 말 것이다. 또 뱀과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뱀에게 물린 사람은 전투력이 사라진 상태기 때문이다. 그리고 뱀에게 재물을 드리지 말 것이다. 뱀을 섬기지 말 것이다. 모세도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다. 뱀에게 물린 상처도 바라보지 말 것이다. 하나님보다 위의 것을 생각하지도, 바라보지도 말라 한다. 오직 구원하실 분은 장대에 매달린 놋 뱀이다. 놋 뱀을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이 그의 상처를 치유한다.
놋 뱀 되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요3:16절의 복을 받는다. 인생의 해결책 역시 놋 뱀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을 때다. 그분은 못 고칠 병이 없다. 사람에게 맞은 맹독도 그리스도에게 나가면 위로받고 다시 새 힘을 얻는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불 뱀에게 물려서 구원에서 이탈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구원에 있기 때문이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마음에 찔림도 동반했을 것이다. 마음에 찔림이 없이는 밤늦게 올 이유가 없다. 니고데모는 학식자로서 종교적인 지위도 월등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모른다.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도 알지 못하느냐? 교회에 오래 다녀도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교회의 중직 자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성경은 지식으로 이해하는 책이 아니다. 깨달을 때 알아지는 책이다. 학자들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으나 성령님이 교사되는 것이 더 좋다. 왜냐면 학자들 역시 하나님의 생각 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경의 통일성에 기준한 추측성 근거일 뿐이다. 진리의 성령님이 오실 때 모든 지식을 바로 잡을 것이다. 니고데모는 말씀이 육신 되신 예수님에게 직접 듣고 궁금증을 해결하였다. 11절 후반 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않아…” ‘우리의 증언’이라고 했을 때, 그 ‘우리는’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증언은 진실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참되게 성령을 받은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사람은 영적인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생활 속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일 것이고, 예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 속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숨길 수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장14-16절).
주님은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니고데모 역시 그랬을 것이다. 예수님이 21절에서 언급한 것을 보면 니고데모의 영적인 상태를 두고 한 말임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니고데모는 믿음이 있는 자임은 틀림없다. 그가 밤늦게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의 말씀을 구한 일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성경을 배우는 열기가 예전보다는 못하다고 하나, 그럼에도 말씀을 읽고 믿음을 지키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말씀을 읽으면서 궁금한 내용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처럼 니고데모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증언을 받지 않는 것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것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
니고데모가 밤늦게 예수님을 찾는 일은 그에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마땅히 선생이 돼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친절하고도 차분하게 말씀해 준다. 그리고 책망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오래된 성도에게는 불편한 일이 되겠지만 하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한다. 어쩌면 교회에 오래 다녀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채 그저 교회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마르다보다 마리아의 입장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왜냐면 진실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에 매달리면 이 또한 허망한 일이 되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내 재주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을 아는데 힘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요즘 작은 교회에서는 사람이 부족한 관계로 이제 출석한 성도에게 많은 일을 맡기는데 어쩌면 젖먹이가 땅 끝까지 전도하고 있는 셈이다. 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성령을 받는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지식을 힘써 알고, 그분의 성령을 받을 때 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그 일 이후에 예수님을 변호하는 일에 노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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