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3. 13:33ㆍ자유와 희망
어린아이를 축복하신 예수님
누구든지 복음 앞에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축복하신다.
그때 사람들이 손을 얹어 축복해 달라고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으나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하시고 그곳을 떠나셨다(마19:13-16).
예수님의 어린이 사랑이 너무 크다. 제자들은 어린아이가 오는 것을 보고 막고 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차별 없이 소중하고 사랑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다. 축복은 함께 나누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녀가 그렇다.
부모는 자녀가 축복받기를 원한다. 지금 자기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는 예수님이 축복의 근원이심을 알았을 것이다. 적어도 믿음을 가진 부모는 맞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고 그 말씀으로 축복을 경험했을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복을 가장 먼저 자녀가 받길 원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 좋은 곳에 오면 다음에는 그 사람이 생각나고, 또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으면 그 사람이 생각난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서 카톡을 보낸다. 자기 자녀를 데려온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축복이 세상이 주는 복이 아닌 영원한데서 오는 복임도 알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은 이적과 기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예수님이 행한 기적과 이적 목격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복을 주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마음에 평화와 평강을 주시는 목적이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그분이 당한 찔림과 상함 그리고 징계와 채찍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분이 주시는 절대적인 복은 그래서 평화가 된다. 따라서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살기가 힘든 것 보다 차라리 마음의 평화가 없는 것이 고통이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는 것 역시 형벌이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마음에 평화가 없기 때문에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마음의 분주함을 끌 수 없는 것도 어쩌면 큰 형벌에 속할 것이다. 물리적인 형벌은 그 순간만 지나면 그만이지만 마음의 형벌이 멈추지 않는다면 이것은 견디기 어렵다. 예수님의 희생은 성도들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민 25:12).” 세상을 살아가는 큰 축복은 주님이 주시는 평화이다. 마음이 잘되면 모든 행사가 순조롭다. 그러나 마음이 시끄러우면 꼭 마지막에서 탈이 나고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생긴다.
지금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누군가가 나를 그리스도께로 안내했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의 부모는 자기의 자녀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주님을 체험하지만, 지금 이 아이는 부모 때문에 눈앞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다. 그의 부모는 자녀에게 최상의 일을 하고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그리스도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까지 주신다고 한다. 한 영혼을 주님께 안내를 했으니 이 얼마나 큰 축인가. 이 어린아이는 부모의 믿음을 통하여 독생자 예수님께 안수와 축복을 받았다.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가 않다. 누구든지 복음 안에서 사람을 나누면 안 된다. 특히 외모와 학력, 재물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해서는 더더욱 곤란하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금하는 일은 하면 안 된다. 그분이 기뻐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반대로 살고 있다면 나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로 인하여 상처 받고 믿음에서 떠나는 이들도 있다. 안타깝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에 그 목에 묶어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하나님은 내 백성을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곧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위대한 것이다. 다윗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99마리를 두고 찾아 나선다. 또 이리가 양을 물고 가면 끝까지 쫒아가서 자기의 양을 도로 찾아왔다. 그러니 하나님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했겠는가. 다윗은 이미 왕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남녀노소 누구라도 자기에게로 나오는 자들을 축복하고, 범사가 잘되기를 중보 하신다. 무엇보다 어린아이가 오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였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모든 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이다."(눅9:48)
누구에게나 복음 앞에서는 평등하고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가 오는 모습을 보고 꾸짖어 야단친다.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민망하신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들도 이 어린아이처럼 될 때 천국 간다.” “제자라고 모두가 천국 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