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2019. 12. 22. 12:18자유와 희망

기다려

기다리는 자가 복 받는다

 

대림절은 크리스마스부터 4주전의 첫째 일요일부터 시작한다. 대림절이 끝나는 시점은 12월24일이다. 이틀 후면 대림절 마지막 날이 된다. 그리고 대망에 성탄절을 맞게 된다. 지금 이 시기는 마지막 대림기간을 보내고 있다. 대림절은 임하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절기다. 그리스도가 오신 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4주간의 기간을 말한다.

우리는 얼마나 잘 기다림을 하며 살고 있는가. 그러나 기다림은 쉽지만은 않다. 매번 성급하여 실패한다. 하루만 기다렸으면 더 좋았을 걸, 특히 결혼이 그렇다. 너무 급하다. 그리스도인이면서 기도하지 않는데서 실패한다. 기도는 기다림의 연장이다. 나의 판단을 그리스도께 위임하는 것이다. 그분은 실수가 없으시는 분이다. 그런데 내가 앞장서려고 한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라고 말씀한다. 기다림을 하는 것은 내게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소망을 전제로 한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되고 삶의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끝없는 기다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다림에는 마침표가 있다. 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해서 믿음 한 단계 성장시킨다. 로마서 5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다림의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으면 단 하루도 기다릴 수가 없는 존재다. 기다림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할 때 가능하다. 기다림에는 유익이 있다. 기한도 없이 기다리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속히 응답도 하시지만 그분의 때에 이루기시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와 나의 때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사실이다. 성도는 내가 계획한 때에 정신을 쏟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계속하여 물어보고 또 묻는 것이다. 기다리면 이삭이지만 기다리지 못하면 이스마엘 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는 기다림을 못하고 장차 그리스도인을 핍박할 민족을 만들고 말았다.

사울 왕 또한 기다림을 못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신앙은 평생에 기다림을 배우는 기간이다. 성령보다 자신의 능력을 우위에 두면 하나님은 질투하고 멸망으로 이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기다림을 가르쳤다. 그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은 조금만 갈증이 나면 물 달라 원망과 불편을 하였고, 배가 고프면 떡을 달라고 또 원망하고 불평했다. 그들의 생활은 매일 원망으로 가득했다. 이들은 조금만 육체가 불편하면 세상을 생각했다. 그때가 정말 좋았는데, 모세가 우리를 애굽에서 빼내지 않았으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텐데, 상황이 조금 어두우면 매일 과거를 회상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림만 잘하여도 상황을 역전 시킬 것을 믿는다.

삶이 더 힘들어지는 것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과거를 회상하기 때문이다. 롯의 마누라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보다 세상을 바라보고 소금기둥이 되었다. 주님은 일하는 소에게 멍에를 씌우지 말라고도 하였다. 또 일하는 자는 앞만 바라보고 가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만약 뒤를 바라보고 밭을 간다면 도리어 일을 만드는 자가 된다. 사도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하였다. 뒤를 바라본다는 것은 잠시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기다림을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신앙은 기다림을 배우는 연속적이면서 반복의 과정이다. 이 말은 매일하여도 부족하지 않다. 왜냐면 듣고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분은 기다리라고 하는데 나는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내 욕심이 찼기 때문이다. 그분이 기다리라는 것은 내 앞길에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라는 신호는 나를 안전하게 하려는 까닭이다. 즉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위에 두어 내 걸음을 견고케 위해서다. 나를 위해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음성에 귀를 막는다. 하나님은 나의 오른편에서 나를 지지하시는 분이시며, 나의 걸음을 견고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발을 헛딛고 넘어지는 것은 다리에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걸음에 힘을 주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조금 빨리 간다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선두에서 뛴다고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달리는 자가 먼저 도착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먼저 나가려고 전 속력으로 달린다. 하나님은 천천히 뛰어도 꾸준하게 뛰라고 한다. 신앙은 내 힘을 믿고 뛰는 경주가 아니고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달리는 것이다. 실족이 오는 것은 내 힘을 믿고 달렸기 때문이다.

기다림의 절정은 욥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반드시 하나님이 나의 고통을 갚아주실 것을 믿었다. 그리고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견디며 기다렸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오셔서 나를 구원하실 것을 믿고 기다렸다. 성경은 온통 기다림을 말씀하고 있다. 축복은 기다림에 있다. 요셉도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어려운 시기를 이기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더 응답한다. 기다릴 때 나의 자아는 깨지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된다. 믿음의 성숙은 기다릴 때 이룬다. 축복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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